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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오순절운동 - 칠레 본문

Anthropology (인류학)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운동 - 칠레

Museum Park 2018. 12. 17. 14:55

남아메리카의 최초 오순절주의자들 중에는 칠레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기원은 매리 앤 루이자 후버(Mary Ann Louisa Hoover)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스 콜린스 후버(Willis Collins Hoover)와 연관이 있다. 후버는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있는 미국인 부흥사였으며, 원래는 1889년부터 칠레에 있던 의사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칠레에서 가장 큰 감리교 성공회의 목사였으며 연회감독이었다. 1907년 후버의 공동체는 후버의 동창인 미니 아브람(Minnie Abrams)가 보낸 소책자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and Fire’를 통해서 인도의 푸네(Pune)에 있는 판디타 라마바이(Pandita Ramabai)의 집에서 젊은 과부들 사이에서 일어난 오순절 부흥에 대해서 알게 된다. 후버공동체는 아브람의 공동체와 유럽의 감리교 오순절교단의 창시자인 토마스 바렛(Thomas B. Barratt)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오순절운동의 부흥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일어났다. 발파라이소교회는 19094월전까지 성령의 부흥과 같은 부분들을 위해서 기대하고 기도하였다. 마침내 19094월 눈물, 통제할 수 없는 웃음, 신음, 쓰러짐, 바닥에 뒹굴음, 사람들의 회개와 죄 고백(1년에 200명 이상의 회심 자들), 환상,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일들을 포함한 흔치않은 뜨거운 역사가 일어게 된다. 여기에서 1년에 200명 이상의 회심자들이 생겨난다. 성령침례받은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라는 강력한 감동을 받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이로 인한 소음과 불편 때문에 현지 언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감리교자체에서도 적대적인 반응이 나왔다. 엘레나(Elena)라고 하는 발파라이소에서 온 젊은 영국여자를 포함한 몇몇 부흥사들은 산티아고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그녀는 산티아고에서 2개의 감리교회에서 예언사역을 하려다가 거절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침례받은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교단을 떠날 것을 요청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모임을 갖게 된다. 1910년 감리교총회는 후버의 발파라이소 교회에 모이게 된다. 그 이유는 후버의 스캔들경솔한 행위들’, ‘거짓과 반 감리교적인 것들’, ‘성서에 위배되는 것과 불합리한 것에 대한 가르침을 전파한다 하여 기소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유들은 부흥운동이 최면술과 관련된 것이라고 조롱받는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후버는 결국 연회감독직을 박탈당했다. 그 사이, 산티아고의 부흥사들은 Iglesia Metodista Nacional(National 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발파라이소 연회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적한다. 19104월 후버는 자신이 웨슬레 신학이나 감리교에서에서 자신을 완전히 분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감리교 성공회를 자진하여 탈퇴한다. 그리고는 NMC의 새로운 감독으로 추대된다. 이 교회는 단순히 민족주의나 단순한 정치적성향 때문에 새롭게 분리되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이름을 Iglesia Metodista Pentecostal(Methodist Pentecostal Church, MPC)라고 바꾼다. 현재까지도 이 MPC는 유아세례와 다른 감리교 구조, 교리, 관행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감리교와의 접근방식은 칠레의 오순절운동과 북미의 오순절운동을 구분 짓는다. 분명히 칠레의 오순절운동은 북미의 오순절운동과 연결성이 있지 않다. 그리고 후버는 칠레의 자생교회(교단)의 창시자가 된다. 게다가 칠레의 오순절운동은 북미오순절운동의 최초증거는 방언의 교리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후버의 시대때부터 성령침례의 수많은 징후 중 하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후버는 1933년 지도력 문제와 교회에서 새로운 음악 및 기타사용에 관한 문제로 Methodist Pentecostal Church를 나오게 된다. 그 뒤로 마누엘 음마나 살리나스(Manuel Umana Salinas)가 총감독이 된다. 그는 1964년 임종할 때까지 그 총감독직자리에 머물렀다. 1950년 그는 자신의 직책을 주교(Bishop)으로 바꾸었다. 음마나는 1910년 감리교에서 추방당한 원래의 산티아고교회의 지도자였으며, 1911년 이래로 계속해서 그곳의 목사였다. 산티아고교회는 단기간 내에 MPC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1928년 조타베체(Jotabeche)로 옮겼다. 1936년 후버가 죽은 후, 그의 지지자들은 이후의 여러 분파들의 지도자들이 되는데 그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성공적인 오순절 교단들 중 하나는 Iglesia Evangelica Pentecostal(Evangelical Pentecostal Church)이다.

적어도 1000개의 교단이 존재하는 칠레의 개신교에서 MPC는 약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파생된 교단은 30개가 넘는다. 그 중 Evangelical Pentecostal Church(EPC)Iglesia Pentecostal de Chile(Pentecostal Church of Chile)MPC에 이어 2개의 가장 큰 교단이다. 2010년 두 교단을 합쳐서 약 100만 명인 반면 감리교인은 3만 명 미만이다. Pentecostal Church of Chile(PCC)1946MPC안의 한 그룹에서 만들어졌다. PCC와 그보다는 좀 작은 Mision Iglesia Pentecostal(MIP)1961WCC에 가입하였다. MIP1952EPC에서 분리된 교단이다. PCC는 전 세계적으로 WCC에 처음 가입한 오순절 교단이다. MPC1967년 미국의 IPHC자매결연을 맺는다. IPHC는 그들의 성결운동(웨슬리안)과 오순절의 유산에 공통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 1965년부터 2003년까지 자비에르 바르뀌즈 발렌시아(Javier Vasquez Valencia)목사가 있었던 산티아고의 서타페체 모임은 MPC의 가장 큰 공동체였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8만명 가량 되었다.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은 공식적으로 19759월 이 조직을 개최해 준다. 개신교인 떼 데움(Te Deum)’이 개회사를 하였다. 바스뀌즈는 2500명의 복음주의진영의 지도자들과 함께 피노체트의 정권을 지원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하였다. 바스뀌즈는 2003년 그가 죽기전가지 1982년부터 MPC의 주교로 있었다.

가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노체트의 억압정책은 그가 오순절운동에 참여하면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기 때문에 피노체트정부와 MPC지도자들의 우호관계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칠레 주류 오순절운동가들은 노동계급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선례를 따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피노체트에 대하여 반대하였고, 1973년의 정권전복이전의 살바도르 알렌데(Salvador Allende)의 사회주의 정치를 지지하였다. 후에 피노체트의 정책에 대하여 반대했던 젊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억압당하거나 고문당하였고, 심지어 죽임당하기도 하였다. 칠레의 오순절교회들과 같이 WCC의 오순절교회들은 특히 군사정부에 의한 박해의 대상이 되곤 했다. MPCEPC는 모두 이웃국가인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칠레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칠레남쪽의 원주민들인 마푸체(Mapuche)족과 북쪽의 아이마라(Aymara)족에 대한 사역에 성공적이었다. 이 부족들은 그들의 수천의 부족원들과 함께 오순절교회들에 가입하였다. 칠레 오순절교회들은 아프리카독립교회와 어떠한 서부세력의 도움 없이 부흥한 20세기 첫 번째 교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