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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오순절운동 - 아르헨티나 본문

Anthropology (인류학)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운동 - 아르헨티나

Museum Park 2018. 12. 17. 14:55

1909년 초, 오순절운동은 아르헨티나에 들어오게 된다. 아르헨티나에 들어온 첫 번째 서양인 선교사는 3명이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Luigi Francescon, Giacomo Lombardi, Lucia Menna였다. 그들은 시카고에서 온 이탈리아계 오순절주의자들이었고, 이탈리아 이민자들과 함께 Iglesia Asamblea Christiana(Christian Assembly Church)를 창설하였다. 노르웨이에서 온 버거 존슨(Berger Johnson), 캐나다에서 온 앨리스 우드(Alice Wood), 미국에서 온 메이 켈티(May Kelty)1910년 초에 왔으며 그들은 오순절적인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서 사역하다가, 1914년 오순절운동을 경험하게 되고는 AG에 가입하였다. AG의 초기 아르헨티나 복음전도자인 후안 바리오(Juan Barrio)1915년 앨리스 우드와 합류하여 그가 이끌고 있던 공동체인 Veinticinco de mayo에서 사역하였다. 앨리스 우드는 1951년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아르헨티나에 남아있었다. Swedish Free Mission에서 온 스웨덴 오순절 선교사들은 1920년 아르헨티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의 AG는 이 나라에서 2번째로 큰 오순절 교단이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단인 Union des las Asambleas de Dios1948년 몇몇 작은 교단들과 미국계 AG교단과 합병하여 만들어졌다. David Martin은 칠레의 초기 오순절운동의 성장을 1930년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오순절운동의 성장과 비교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개신교회들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때문에 성장하게 되었기에, 근본적으로 유럽의 오순절교단 성격을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칠레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노동계급의 칠레인들이 큰 도시에서 자기 민족을 복음화 하였고, 이들의 개종에 의해 성장한 독립적인 오순절교회들과 유럽에서의 큰 규모의 이민자들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이 상황은 1954년 후안 페론(Juan Peron)대통령의 후원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권력을 힘입은 미국의 복음전도자인 토미 힉스(Tommy Hicks) 이후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오순절교회들은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후반, 기성 교회들에서도 은사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는 그들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과거 AG목사였다. 급진적인 제자도에 대한 그의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1962년 아르헨티나의 소수민족이었던 Toba족 사이의 오순절 부흥운동으로 인해 Iglesia Evangelica Unia Toba라는 자생적인 토바(Toba)교회(교단)가 생겨난다. 이 교회와 Church of God in Argentina(CGA)WCC의 회원이다. CGA는 가장 큰 오순절 교회들 중 하나이며 가브리엘 비까로(Gabriel Viccaro)박사가 이끌고 있는 공동체이다. 아르헨티나의 오순절 교단은 1990년대 가장 빠른 성장을 일구어 낸다. 한 자료에 의하면 2000년 아르헨티나에는 350만 명, 또는 전체 인구의 9%가 오순절주의자였고, 칠레는 180만 명 또는 전체 인구의 12%가 오순절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 통계에 따르면 칠레 인구에서 은사주의자들은 대략 24%,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은사주의자들은 19%에 육박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부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복음전도자인 카를로스 아나콘디아(Carlos Annacondia)가 강조하는 교회개척과 복음전도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새로운 오순절 교회들이 빠르게 확장되어져 나갔다. 그의 계획과 그 모임들은 결국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오순절 교회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의 천막 사역은 사람들에게 개종, 치유, 귀신 쫓음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그걸 넘어서 국제적으로까지 퍼져갔다. 그의 조직은 Mensaje de Salvacion(Message of Salvation)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에는 백만 명 이상의 AG회원들이 있다. 오마르 카브레라(Omar Cabrera)가 선포한 프로젝트인 Vision del Future(Vision of the Future)2000년에 300개 센터, 112천명의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카브레라는 1972년 이 사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해줘야 할 필요,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해줘야 할 필요, 그리고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조직은 중간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Vision del Futuro(Vision of the Future)은 궁핍한 어린아이들과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사회봉사활동과 구제에 큰 열심을 내었다. 카브레라는 남아메리카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흔치 않게 성직자용 상의(신부용 셔츠)와 보라색 조끼를 입었다. 그는 2001년 갑자기 죽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Omar Cabrera Jr가 그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계승자가 된다. 1980년대에, 나중에 불명예자가 된 헥터 기메네즈(Hector Gimenez)Ondas de Amor y Paz(Waves of Love and Peace)운동으로 그는 도시 중심에 있는 극장에서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매일 5가지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전에 마약중독자였던 그는 1986년 이 운동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2000년 아르헨티나의 센터뿐만 아니라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미국에서도 300번 이상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기메네즈는 재정적인 문제와 도덕적인 부패에 대한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다른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교단에서 퇴출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좀 더 최근의 오순절주의자들은 클라우디오 프레이드존(Claudio Freidzon), 오스발도 카니발(Osvaldo Carnival), 길레르모 프리엔(Guilermo Prien)가 있다. 이들 모두 작게 시작하여 도시 중심지에 대형교회들로 이어갔다. 수천 명의 작은 교회 목사들은 그들의 스타일, 메시지, 프로그램들을 따라하였다. 1986년 프레이드존은 수백 개의 교회들과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 the Rey de Reves(King of Kings)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은 또한 북미에서 부흥집회의 유명한 설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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